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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CIDE (부제: 자살여행)

by.DG

케니, 조금 오래 걸렸지. 나, 드디어 결정했어. 그래, 그거 말이야. 여행 간다고 했잖아. 이미 짐이랑 필요한 돈은 전부 싸뒀어. 그래서 말인데... 같이 갈 거지? 아니다, 가야 해. 넌 나랑 무조건 같이 가야 해.


 

 

내가 그리 똑똑한 머리는 못 된다는 거, 인정한다. 가난 끝에 못 배운 탓도 있지만 타고나길 모자라게 태어난 게 죄였다. 오죽했으면 남들이 미래의 내 모습 운운하며 망상의 최고봉을 찍을 시절부터 바닥인생을 예감했겠나. 세상 사는 건 어느 시대나 가릴 것 없이 좆같다고들 하지만 그 모든 걸 떠나서라도 삶이 추잡해질 것을 진작 받아들이고 있었다. 날 적은 초라했고 끝은 비참하다. 가난한 아이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사회의 최하층에서 값싼 노동력만 뽑히다 길바닥에서 얼어죽을 미래였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남들보다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부모가 생을 달리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죽음을 조금 아픈 리셋이 아닌, 죽음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걸 반겨야 할까? 저주에 상쇄되던 죽음과 부활은 심심한 크툴루의 장난질에 불과했고 나는 이례 없는 세계 유일의 사망체험자였다. 살고 죽는 게 절대자의 유흥이라면 목숨은 가치 여부의 토론 거리도 못 되는 것일 텐데, 다른 사람들이 이걸 알면 어떻게 될까. 저는 죽었다 살아나요. 근데 이게 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우리 철없는 부모새끼가 크툴루한테 엿 좀 먹였더니 이렇게 됐네요. 부러워요? 가서 한 번 해봐요. 크툴루 엿먹이기. 혹시 모르잖아요. 전 세계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되면 참 재밌겠어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이 비아냥의 핵심은 지옥의 기로를 넘을락말락 하는 존엄한 장난질 이상으로 귀찮고 눈물 많은 스탠을 위한 것이었다. 종 단위까지는 아니어도 내 주변 인간들이 살고 죽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는 인간이길 바랐건만 그 애가 정 많고 선심 쓰는 척하는 인간에 불과해서 일이 이 지경으로 꼬여버렸다. 내 딸리는 지능으론 저 애의 모호한 의중을 파악하기가 매 순간 어려운 일이었다. 헛된 기대를 심어주고 나 몰라라 하거나 자기 일조차 버거워하며 발 빼기가 일상인 인간이니까. 그만하면 익숙해질 법도 했는데 이번엔 순전 내 문제에 발목을 잡혀 나는 그마저도 알아챌 수 없는 천치의 바보새끼가 돼버렸다. 하지만 문제의 발단이 어쩌다보니 나로부터 출발한 셈이었고 거기에 나는 어느 위선자와는 달리 책임을 느꼈다. 그 애의 요구에 따라 짐을 꾸려 버스를 수십번 갈아타고, 기차를 타고, 가끔 필요하면 비행기를 타고. 여행비용은 스탠이 모두 낸다지만 그 애는 대의인 척하는 기만을 베풀 뿐이었다. 어려운 문제다. 나는 원래도 모자랐지만 스탠의 바보같은 면에 푹 빠져서 더 모자란 놈이 돼버렸다. 당최 종잡을 수가 없는 이 앨 어떻게 대해줘야 할 지 감이 안 온다. 그래서 그냥, 그래, 끝까지 한번 원하는 대로 어울려주기로 해봤다. 네가 말하는 네 끝이 어떤 꼴일지 궁금해져서.

 

 

 

 

 

버스 창문 밖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콜로라도 주 시골구석에서 보던 풍경과는 많이 달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건물 많은 것도 웃기고, 시끄러운 것도 웃기고, 무엇보다 아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이상하게 우스웠다. 거기선 눈만 돌리면 아는 인간들이었는데, 여긴 하나도 없잖아. 아, 하나는 있구나. 스탠은 옆자리에서 내 어깨를 베고 자고 있었다. 아마 깨어난 후엔 내 옷의 눌린 자국을 보며 거듭 사과할 것이다. 내가 불편할까봐 사과한다기보단 괜히 어색할 상황이나 만들어놓고 그 마음을 감추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느낌의 사과. 실제로 그런 내용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나의 말은 스탠에게 중요치 않고 스탠의 수동적인 화법은 내게 와닿지 않았다. 침이 입술 끝에 아슬하게 매달린 것을 보고도 무시했다. 생 타인을 대하듯, 나는 조금 너그러운 사람인 듯, 우리가 아는 관계라는 걸 버스 사람들에게 들키려면 아직 두 정거장이나 남아있었다. 나는 지도를 열고 지리를 살폈다. 예정대로라면 10시에 숙소에 도착했어야 했다. 지금은 11시 20분이다. 장거리 여행이 피곤한줄은 알지만 나보다 체력도 좋은 애가 이토록 늘어진 걸 보니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얘가 나를 뭐, 무슨 정신적 버팀목같이 생각하는 걸 아니까 더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스탠, 일어나."

 

"으, 어어.. 벌써 다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11시 반이야. 네가 10시엔 도착할 거라며."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스탠은 이질감을 느끼고 턱 부근을 문질렀다. 느껴지는 끈적한 감촉에 곧 손가락을 보더니, 대충 소매로 그걸 문질러 닦고 손끝은 바지에 문대었다. 내 앞이라서 일부러 저러나. 부뜩 요즘 들어 스탠의 사소한 행동에도 의미부여를 하게 됐다. 그런데 저런 짓에 의미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나. 스탠이 소매를 축축히 적실 동안 나는 가방을 들어맸다. 배낭 하나, 손가방 하나, 다른 가방은 스탠이 들게끔 내버려둔다. 문이 열리고 통로의 사람들 행렬에 껴 우린 각자 버스를 내렸다. 늦을 걸 예상이라도 했는지, 다행히 스탠이 예약한 숙소는 걸어서 5분거리에 있었다. 우린 발을 땅에 디딘 순간부터 입을 닥치고 숙소까지 걸었다. 숨이 차기도 했고 딱히 말 할 주제도 없었다. 이리 말한들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이유였다. 내 뒤에서 내 뒷통수를 보고 걷는 스탠의 이유는 아니었다.


 

 

숙소에 도착한 뒤, 방 안에서 걸친 옷을 대강 풀어헤치고 휴식을 취했다. 우리가 처음 내뱉은 말은 평범했다.



"보스턴은 생각한 것보다 좀 다르네."

"그러네."

 

 

넌 여기가 어떨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당연히 질문이 돌아올 줄 알았다. 대답을 위해 벌린 입이 무색하게도 다시 침묵을 맞이한다. 나는 옷가지를 꺼내다 말고 스탠을 본다. 스탠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세수용품을 꺼내고 있었다. 사실 내가 꺼내고 있던 옷의 반 이상도 스탠 건데. 가방 밑바닥까지 꽉 눌려있다가 온통 구겨져버렸던 내 옷을 겨우 꺼낸다.



"돈은 충분해? 많이 아껴쓴 건 아는데 여행 온 지 벌써 2주나 지났잖아."

"내가 돈 문제는 신경쓰지 말랬잖아, 케니. 네가 내는 것도 아닌데."

 

"아 그래... 미안."

 

"... ...아니야, 미안해. 좀 피곤해서."

 

 

스탠은 이 여행을 위해 꽤 오래 알바를 뛰었다. 처음엔 나에게 부탁해서, 데니스의 성실한 친구로 추천받아 일을 시작했다. 다른 애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곳은 피하고, 마을 외부인이 종종 들리는 가게 위주로 일을 했다. 밤낮으로 일하다보면 아저씨나 아줌마께서 물어볼 법도 했을 텐데 그 사람들 눈엔 그냥 재활중인 걸로만 보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내가 알지 못한 제 방에서의 스탠은 송장이나 다름 없다고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인간들은 스탠이 나와 여행을 가겠다고 할 때 굉장히 기뻤을 거다. 제 아들이 관자놀이에 바람구멍 내러가는 줄도 모르고.

 

 

나와 여행을 가겠다고 선포하던 날, 나는 카일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래서 염치없이 스탠에게 물었었다. 결연에 가득찬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스탠은 어두워진 낮빛으로 대답했다. 말 안했어. 카일은... 분명 꼬치꼬치 캐물을 거야. 거짓말이었다. 스탠은 카일을 향한 기대감이 깨질까 두려워 말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성의 없는 "아, 그래? 잘 됐네, 푹 쉬다 와." 라든가, "왜 하필 케니랑 같이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다녀와." 같은. 은연중에 느끼는 게 틀림없었다. 카일에게 스탠은 더 이상 인생의 주축을 차지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스탠은 누군가, 이왕이면 사랑하는 베스트프렌드, 카일의 애정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딱 좋은 제물로 바쳐진 게 체감상 나였다. 당사자 된 인간으로써, 아무리 모자라도 이 정도는 눈치채게 되더라. 나는 이래저래 선택된 인간이 맞긴 했나 보다. 뒈지게 아픈 저주에 이어 폐기되기 일보 직전의 베프 자리까지 물려받지 않은가.

 

 

그대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 부유하는 잡념은 의심의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스탠이 나를 도와준 것도 어쩌면 다 계획된 게 아니었을까? 그날 날 구하겠다며 우연찮게 주워든 술병이며, 머리를 내려친 것도 모자라 깨진 병조각으로 그 인간을 찔러 죽인 것. 마침 그 인간이 다른 마을 출신 경력 20년의 노숙자라 저들끼리 치고박다 운나쁘게 죽었다는 수사결과도, 스탠에게는 가능했다. 스탠은 자신을 위한 결과라면 가당찮은 변명따위 얼마든지 지껄일 수 있었다. 남을 위한다는 훌륭한 밑밥까지 깔리면 죄책감도 증발하니 완벽하다. 나는 케니를 살리려고 했을 뿐이야, 라며, 자기위로하는 얼굴. 곧 쓰러진 내게 다가와 괜찮냐며 다가오려다 주저앉는 다리. 변명도 불가능한 핏자국이 갈색 자켓에 묻어 얼룩덜룩해졌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스탠이 오기 전 이미 몇 대 얻어터졌었던 내 입술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스탠.

스탠, 괜찮아.

걱정 마. 이건 정당방위야. 내가 증언해줄게. 진짜야. 아무렴, 단번에 기절하지 않은 그 인간 잘못이지. 먼저 술 취해서 지랄염병해댄 것도 저 사람이고.

 

왜곡된 면이 적잖이 있긴 해도 내용의 핵심은 뚜렷할 것이다. 이후 나는 고맙다는 말로 스탠의 합리화를 도왔다. 눈물을 찔끔 내보이며 네 덕에 안도했다는 느낌을 받게 하고 조금 억지스럽지만 충동적인 척하는 포옹. 나는 살인도 없었던 일인 양, 스탠을 와락 끌어안으며 어깨 너머의 시체를 바라봤다. 아, 그땐 정말. 텅 빈 위장조차 역류하여 토할 것만 같았다.

 

 

 

 

 


아침 해가 떠오른다. 햇살이 하늘을 채 덮지 못해 어둑했지만 이미 충분히 기상할만한 시간이었다. 그래봤자 매일을 새벽노동으로 다져뒀던 나 한정의 기상 시간이다. 스탠은 아직 팔자좋게 숙면중이었다. 차도 아직 덜 다닐 시간대라 익숙해질 뻔했던 고요함이 스탠의 쌕쌕거림에 말려들어갔다. 나는 가볍게 옷을 걸치고 냉장고를 열었다. 몇 통의 생수, 한 캔의 사과주스, 세 캔의 맥주가 들어있었다. 그 중 한 캔을 따 목을 측였다. 마실 수 있을 때 마셔두는게 내 삶에 이롭다. 한 모금에 반 가까이를 삼켜내곤 가방을 찾는다. 널부러진 옷자락에 뒤집어진 양말이 가관이었다. 서로 치우라고 잔소리할 상태도 못되므로 나는 그것들을 발로 헤집었다. 그중에서 새옷만, 아직 입지 않았거나 도중에 깨끗이 빨았던 옷만 대충 정리했다. 그리고는 지갑, 물, 지도 같은 것을 따로 챙긴다. 오늘 나갔다 들어오면, 내 예상이 맞다면 자질구레한 것들은 짐만 될 예정이었다. 나는 냉장고를 흘긋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맥주 두 캔을 마저 꺼냈다. 만약 스탠이 본다면 쓸데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직접 핀잔 주진 않겠지만 나를 보는 표정이 꼭 그러할 것을 직감적으로 예감했다. 그래도 저녁쯤 되면, 아주 차갑지는 못할 망정 목 축이며 나눌만한 얘깃거리정도는 만들어 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스탠도 마지못해 받는 척 하며 캔을 부딪히겠지. 그런 망상으로 나는 맥주 두 캔을 내 가방에 쑤셔넣는다. 표면의 물기 탓에 가방이 조금 젖어들었다. 


"뭐 해?"


스탠이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이제 상당히 볼록해진 가방을 스탠에게 들어보였다. 스탠은 멋대로 뻗친 머리를 넘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우리는 함께 가방을 쌌다. 내가 들 것에는 지갑, 물, 맥주, 지도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스탠의 가방에도 아마 비슷한 것들이 들어있었을 거다. 대충 짐 정리를 마치고 우린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이 곳을 한 바퀴 둘러볼 예정이다. 스탠의 계획에 의하면 그러했고, 딱히 어딜 갈 것인지 정확히 정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우리가 어딜 행할 것인지 대강 예상이 가능했다. 우리 여행에는 몇 가지 암묵적인 원칙이 있었다. 하나는 최대한 사람 많은 곳(관광 명소 등)을 피해다니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계획 없이 발 닿는 대로 향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규칙이랄 것도 민망할 정도로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지도로 대놓고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고, 스탠은 인터넷에서 미리 알아본 정보를 외우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첫번째 규칙에 위배되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그냥 단순하게 보자면 여행 코스는 스탠의 뇌내 설계에 의해 이미 정해졌다는 이야기였다. 또 인적 드문 곳만 찾아 헤맬테면 애초 이런 도시따위 눈여겨보지도 않을테니 말이다. 즉, 내 생각이 맞다면 오늘 스쳐 지나갈 곳중 하나는 보스턴의 유명한 체육대였다. 넓은 운동장은 기본이요, 매 시간마다 경기를 뛰는 학생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대학 진학을 앞둔 나이인만큼 적성에 맞는 학교를 보면 아무 잡생각이라도  들게 될 것이었다. 더군다나 지금같은 상황에서 스탠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망할, 너무 뻔해서 진부한 감정들을 공감하고 싶진 않다. 나는 스탠의 뒤를 따라 걸었다. 스탠에게 지금은 내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이것 참, 몇 번을 곱씹어도 전부 의미없는 짓거리들뿐이다.

 

 

여행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산보가 시작됐다. 숙소에서 출발해 막 공원과 고급 아파트 단지를 지나친다. 스탠의 뒤에서 나는 미인의 어깨를 붙잡고 구역질을 하는 남자를 보았다. 조금 지나자 이번엔 한껏 취한 채 전화 너머로 술주정하는 남자도 보았다. 꼬인 발음으로 고백과 욕설이 엉망으로 뒤섞여있었다. 적당히 감촉이 폭신한 땅에 들어섰을 땐 밤이 내려앉은 듯 새까만 머리를 한 소년이 있었다. 대여섯쯤 되는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의 유별난 머리색과 눈색(변명을 보태자면, 주변에서 오직 그 아이만이 그런 색이었다.)은 스탠의 이목을 빼앗았다. 이것이 실체가 있는 상이든 아니든 내가 보고싶은 것을 비추는 건 분명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의 뒤를 쫓고는 있지만 추상적인 의미에서, 스탠이 두고 온 것들이 미련이 되어 햇빛에 반사됐을 뿐이었다. 이 눈에 비치던 건 그 어느 본질도 담지 못하고 스탠의 욕심이 그대로 투영된 미련이었다. 바로 뒤에 있는 내가 저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혹여 발걸음이 빨라 삐쩍 마른 내가 지쳐있진 않은지, 절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스탠은 제 전신을 무참히 도륙내어 또다시 비겁한 수로 나의 동정심을 구하고 있었다. 이대로 동화되지 않는다면 난 영원히 스탠의 외부에 서 있겠지. 그렇다고 저 안에 들어서기엔 경계선 끝자락에나 매달리게 될 내 모습이 훤했다. 결국 이런 스탠의 간절함을 알아줘야 할 이유는 안타깝게도 지독한 감정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끝에 사라지고 없을 감정을 위해 스탠의 응석을 받아줬다간 죽어도 끝나지 않게 되리라.

 

우리는 그냥 걸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말도 않은 채. 그 대학조차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뜨끈해져 도무지 마실게 못 되는 맥주를 버리지도 못하고, 표면의 물기에 가방만 적셔가며 나는 걸었다. 스탠도 걸었다.

 

 

 

 

 

 

 

보스턴에서의 하루가, 아니, 뉴욕에 다다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그랬듯 지난 몇 달 간의 기억은 가뿐히 뭉개져버린다. 목적지에 닿은 이상 지금까지 소비했던 모든 시간은 이 순간이 빛나길 바랐던 것이라며 치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뉴욕은 지나치게 찬란했고 눈이 부셨다. 낮이나 밤이나 빛으로 아프게 눈을 찌르는 것이 참 배려없는 동네구나 싶기도 했다. 늙은이들이나 할 소리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껴진 것을 어쩌겠는가. 그나마 건강한 피가 흐르는 스탠은 조금 활기 넘쳐 보이긴 했다. 한밤중의 가로등은 스포트라이트가 되고 쨍한 야경은 스탠을 위한 백그라운드 스테이지로서 존재했다. 골드 계열의 빛을 머리 끝에서부터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독무대에 출현하여 운을 뗄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희극 배우만 같았다. 어쩐지 뒤를 따라 걷는 사이의 거리가 애매하게 멀어진 덕분에 나는 관객을 자처하기로 한다.

 

 

"맞다. 레스토랑 예약해놨어. 네가 뭘 좋아하는 지 몰라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메뉴 들어있는 세트 시켰는데."

 

"아… 그래."

 

"안 놀라?"

 

 

스탠은 내게 기대했던 반응이 보이지 않자  풀죽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하자는 거지. 과장된 몸짓에 당혹감을 내비추자 제 말에 대한 뒤늦은 반응으로 알아듣기라도 한듯 스탠은 금세 표정을 푼다.

 

 

"물어볼 줄 알았지. 갑자기 웬 레스토랑이냐고."

 

"그 생각 하긴 했어."

 

 

깜짝 선물인 척하는 식당 예약이 그간 햄버거나 질리도록 먹여온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일 것이다, 라는 것도. 내 딴에는 굶을 일 없어서 나름 좋았어도 스탠에겐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스탠에게 있어 나는 쉼 없이 일만 해야 살 수 있는 불쌍한 애였을 테고 전후사정이 어쨌든 생계를 내팽긴 채 억지로 끌려온 몸이니 마땅히 스탠에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추측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정작 세어보니 자기 돈도 간당간당하지, 뭐 하나 제대로 즐긴 적 없이 종놈처럼 끌고다니기만 했으니, 이렇게라도 달래주겠다는 수작을 알지만 늘 그래왔듯 넘어가준다. 정말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니까.

 

 

"근데 이런 날도 있겠다 싶어서. 나름 여행 중이잖냐."

 

"맞아, 그냥 내가 먹고싶었어. 아, 웃지 마라."

 

 

별 시덥잖은 이야기나 지껄이느라 스탠은 내 바로 앞만큼 걷고 있었다. 가로등길은 옛저녁에 끝났다는 걸 그제서야 알아챈다. 스탠은 조금 오랜만에 웃었고, 그걸 보던 나는 기분이 묘했다. 뭐, 이런 건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렇게만 있겠다면 아직 괜찮다. 괜찮길 바라는 내가 어떤 새로운 기우를 놓치고 있다는 불안이 물씬 차올랐지만 애써 안도한 시간을 배려해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하늘로 추락할 것 같은, 그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지친 걸지도 모르겠다. 죽지도 못하게 붙들어 놓고 내 기운이며 깡이며 죄다 빨아먹힌 탓이다. 웃어주면 뭐해. 다시 죄 훔쳐가버리면서. 내가 끊임없이 쫓아가게만 만들고 자꾸 나란히 걷지 못하게 하는 스탠 마쉬. 나는 네가 진짜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계속 솔직해줬으면 좋겠는데. 의심스러우면서도 매달리게 되는, 유치한 비유를 하자면 마치 중독과도 같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주 근사한 식사를 했다. 나름 레스토랑이니 갖고있던 것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갔다. 내가 골라봤자 제일 좋은 옷은 그나마 가장 멀쩡한 옷에 불과했지만 스탠은 이럴줄 미리 생각이라도 해뒀다는 듯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우거지다 못해 덤불진 머리는 그럭저럭 조치를 취했고 우린 나란히 입장해서 저녁을 즐겼다. 화학물질과 MSG에 범벅이 된 것만 먹어주다 좋은 것들로 양껏 배를 불리니 어째 영 적응이 안됐다. 위장에 때껴있던 더러운 기름찌꺼기를 깨끗한 기름으로 청소한 기분이랄까. 각종 신선한 샐러드로 내벽을 데코까지 해주니 기분이 아주 괜찮다. 이거 봐, 잠만 자고 지나친 도시들 들릴 바에 깔끔하게 며칠 돈지랄하고 끝냈으면 얼마나 좋아. 스탠도 참, 뒈지러 간다면서 직접 정한 수명 억지로 늘리려고 발악을 다 했다. 눈물나게 사랑스러운 새끼.

 

 

우리는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줄곧 부족했던 대화를 모조리 청산해버리겠다는 마음가짐 수준으로 별별 주제를전부 쏟아버렸다. 고급식당 예절이야 애초 우리가 가질 만한 것이 못되었으니 버린지 오래였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바로 시시껄렁한 다른 화제를 들고 왔고 심지어는 카일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눴다. 여행중 카일에 대한 말은 일절 금기나 다름없던 것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나온 거, 오늘 밤은 죽도록 놀아보는 게 좋았을 텐데. 그도 그럴게 이제 작별까진 거의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태고, 수중에 들고 있는 돈은 여전히 예상보다 많았다. 아무나 괜찮으니 하룻밤 정도 뒹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봤자 별 볼일 없고 풋내나는 애들이랑 어울릴 여자는 없겠지만.  헌팅은 되도않는 소리였고 매춘은 욕이나 얻어 먹을 게 뻔했다. 그래도 별 수 없지 않은가. 남다른 충동만을 탓하기엔 이 여정은 시작도 과정도 지나치게 삭막했다. 

 


"스탠."

 

"왜."

 

"섹스하고 싶다."

 

"미친... 질리지도 않냐..."
 

 

예전같았으면 시뻘개졌을 얼굴이 질색을 하고 돌아선다. 반농담쯤 되는 행동인 건 알겠지만 조금 상처받았다. 나는 스탠에게 받은 돈으로 주섬주섬 계산을 했다. 그 사이 스탠은 테이블 위에 꽤 많은 양의 팁을 남겨두었다. 우리는 조금 어색해진 기류 속에 레스토랑을 나섰다. 비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는개가 내리고 있었다. 스탠은 습한 공기가 노곤함을 쫓아버린다며 마음에 들어했다. 내심 걸어가고 싶어 한 것 같지만 알 게 뭐야. 나는 지체하지 않고 택시를 잡았다. 빗속을 걸어가면 모처럼 빗어 넘긴 머리가 엉켜버릴텐데도 대수롭지 않았나보다. 자리에 앉은 첫 몇 분 간 우리는 질낮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조금 지나자 대홧거리는 떨어져버렸다. 사실 더 만들어내려면 억지로라도 입을 열 수 있었지만, 됐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했다. 지나친 대화는 내일의 내게 해롭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튿날은 총기를 사러 갔다. 어차피 한 번만 쓰고 버릴 생각이었으니 제일 싼 걸로. 스탠은 덤덤한 척 했다. 덤덤한 척 하는 제 얼굴이 오히려 더 위화감을 풍긴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른 채, 총포상과 대화를 했다. 삼촌이 총포상인데도 스탠은 총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스탠은 무의미한 질문들을 늘어놓았고, 총포상은 또 호탕하게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건 이런 부분인데 관리가 꼭 필요하다든지, 이 부분은 정교한 부분이라 잘못 손대면 큰일난다든지 등 전혀 필요없는 설명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한 발, 혹은 아예 쓰이지 않을 총을 고르고 고른지 수 분 후, 겨우 스탠은 권총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나는 묻고 싶었다. 불발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쏘아도 나가지 않을 확률, 그럴 경우는 대개 불량품인지라 거의 있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정확한 수치로 확인받고 싶었다. 어차피 총의 주인은 내가 아니니 물어봤자 이상한 인간이나 되겠지만 말이다. 결국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으니, 그저 의미 없는 고민으로 포장해 감춰버렸다.

 

 

총알 없는 빈 껍데기를 만지작거렸다. 안전장치를 풀었다 채웠다하는 스탠의 시선은 온통 손 위의 권총에 향해있었다. 내일이라지, 정말 죽는 날이. 매끈한 몸체를 쓰다듬다보면 자살의 각오가 실감이라도 난다는 듯 스탠은 한참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나는 섣불리 말을 걸지 않았다. 아, 또 그때같이. 우수에 차다 못해 감정이 덩어리째 뚝뚝 떨어져흐르는 눈빛이 슬며시 다가온다. 내가 말을 걸지 않는 게 아니라 걸지 말라는 무언의 표현이다.  나는 헛웃음을 짓고 스탠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그에게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스탠, 왜 뉴욕에서 죽겠다고 한 거야? 사람이 많은 곳은 그토록 피해다녔으면서, 어딜가도 사람뿐인 곳에서 죽고싶다고? 죽음마저도 남의 눈이나 신경쓴다는 것.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잊혀지지 않길 바란다는 것. 그런 뻔한 전개는 아닐 거라 믿고 싶다. 아무나 좋으니 조각난 따스함이라도 나눠달라며, 정작 바라는 걸 주려는 상대는 칼같이 재고 가리는 그의 성질을 감안한다면 바로 맞췄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긴 하다. 스탠은 닳도록 쓰다듬어댄 총을 겨우 가방에 집어넣었다. 저 손동작 한 번에 몇 만의 미련이 묻어버렸을까. 나는 스탠의 가방 지퍼를 잠궈줬다. 추가로 샀던 소음기도 그 안에 쑤셔넣은 김이었다. 내일은 기대되는 날이다. 내가 만날 몇 억번 째의 천국과 처음 만날 지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생을 마감하기에 뉴욕은 마땅찮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기 위해 가장 외진 장소를 찾았다. 스탠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어깨에 힘을 잔뜩 실은 채 내게서 뒤돌아 앉아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평정심을 덧바를 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장비하고 나는 직접 총을 꺼내주었다. 장전은 서비스. 스탠, 이름을 부른다. 어깨를 톡톡 두드려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스탠의 손목을 잡아 총을 올려주고 그대로 스탠의 손과 함께 총을 쥐었다. 기분이 어때? 웃어주고 싶었다. 애정이 묻어나는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싫어하겠지. 이것도 억누르기 여간 힘든 짓이 아니다.

 

 

"케니."

 

"응."

 

"...죽는 거 지켜봐 줄 거지?"

 

 

흐르지 않을 만큼 눈물이 고여 불투명한 눈으로 스탠은 물었다. 네가 기대하는 대답을 찾아주려했지만 선택을 미루고자하는 미련함만 맞닥뜨리고 만다.

 

 

"그러길 바라?"

 

 

스탠은 눈가를 미세하게 찌푸리며 아주 살짝 고개를 틀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이 들려왔다. 울 것 같아. 그런 기미가 보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탠은 겹친 손을 옥죄여왔다. 곧 내 손등에 미지근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야, 난 잘못한 거 없어. 씨발 그건, 그건 누가 봐도 정당방위 였다고. 그 개새끼가 먼저 널 죽이려 했잖아. 만약 재판받았대도 처벌 없었을 걸. 아, 이건 아닌가? 죽이면 나쁜 거지. 아, 씨발, 아니야. 내가 뭐라고 하는 거지. 존나 씨발 자살하고싶다. 정신 사나워. 아니 사실은 죽기 싫어. 케니 난 죽고 싶지 않아. 그치만 죽지 않으면 안 돼. 무서워. 무서워. 무섭다고..."

 

 

먹먹하게 메여버린 목소리가 웅웅거린다. 없어져야 할 감정만이 지독히도 피어난다. 이해해 스탠. 살인은 특별한 경험이지. 내가 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지만 충분히 무섭고 좆같다는 건 알겠어. 멍청한 자식. 그러니까 왜 나섰어. 나는 너를 사랑, 씨발 그래 존나 까놓고 말해서 너를 사랑하지만 너를 사랑하지 않으려 했단 말이야. 내 앞에서 울지 마. 내 앞에서 약해지지 마. ...왜 나를 구했어? 네 알량한 도덕심은 왜 평생을 뒈져있다 갑자기 튀어나온 거래?

 

 

"케니, 케니 제발... "

 

 

눈물나게 사랑스러워, 네 추태조차 빛나보이는 나는 혐오스럽고. 너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데도 네 모든 게 황홀하게 느껴져서 나는 추악해진다. 너의 끝, 바라던대로 지켜봐 온 과정, 끝까지 말해주지 않은, 이제서야 들려주게 될 네가 간절히 원했던 말.

 

 

"그래... 같이 죽자."

 

 

의심스러우면서도 매달리게 되는 그건 마치, 네 울음 섞인 환희와도 같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포갠 손 사이의 권총을 쥐었다. 관자놀이에 닿는 한기 서린 총구는 역시 내게 제일 익숙한 것이었다. 엉망이 된 스탠을 마주하는 나는 차분했다. 말그대로 그 어떤 동요도 내비추지 않았다. 나를 보는 스탠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측하는 바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그저 그뿐이다. 모른다는 말로 흐뜨려 놓기에 딱 알맞은 관계였다.


한 발 남은 총알과 돈이 없는 지갑, 남은 건 사우스파크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 여행의 목표는 내가 사라진 후 스탠 본인에 의해 으스러지겠지. 기반을 마련해준 나는 이제 기다리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천천히 와, 서두르지 말고."


직후, 사랑이 핏물에 녹아 사라져갔다.







 

 

가장 익숙한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는 늘 그랬듯이 막 태어난 참이었다. 캐런은 인기척도 없이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보고 의아해했지만 나름대로 수긍하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채비를 하고 도심에 갔다. 그저 우두커니 한참을 서있었다. 그곳에서 찾아낸 카일과 스탠은 유독 저희끼리만 신이 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카일이 먼저 이름을 불러주었다. 스탠의 눈에는 난색이 번졌다. 확인 차 흘겨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쳐버리자, 스탠은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서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너의 끝은 별 볼일 없었다. 결국 너는 고작 그 정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겨우 그만큼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스탠의 여행에, 자살에 합류했다. 분수같이 솟아나던 핏물을 뒤로하고 죽어버렸던 나는 이제 뉴욕의 값싼 공동묘지 신세를 지고 있다. 죽지 못한 스탠은 곪은 자신을 안고 가길 택했다. 이제서야  우리는 모호한 관계가 아닐 수 있다. 유쾌하다. 자살한 사랑을 기려주자. 이제, 이 끝에 버리고 온 사랑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으므로.

Reason To Hate You - Rhys Lew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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