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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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닌
예고 음악과AU @hooongnin_
11월 어느 날, 하코네예술고등학교 음악과의 사쿠라이 부장선생님은 아침조회를 시작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음악과 학생 전원을 연습실로 모이게 했다. 아직 잠이 깨지 않았는지 몽롱한 눈으로 멍하니 있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으나, 대부분은 단상 위에 서 있는 부장선생님을 평소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올린과 2학년의 나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친구들의 눈빛을 보고 무언가를 느껴, 올 게 왔다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사쿠라이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께서 공고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제1바이올린과 콘서트마스터가 나기사 카오루라는 것이 알려지자 음악과 친구들은 올해에도 역시 나기사라며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나는 박수치는 척 하면서 조용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다시 바이올린과 교실로 돌아온 나는 주번이라서 먼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뒷문 바로 옆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나기사에게 걸어갔다.
“축하해, 이번에도 콘서트마스터더라? 나기사 군이 콘서트마스터가 안 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난 혹시 내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역시 천재는 달라. 선생님들한테 사랑 많이많이 받아서 좋겠다. 그런데 말이야, 너 이렇게 잘나간다고 해서 자만하는 건 아니지? 그랬다간 바이올린과 모두, 아니 음악과 전체, 아니 전교생의 적이 될 거야. 조심해.”
나는 나기사의 앞에서 콘서트마스터가 된 것에 대한 축하를 가장한 비난을 쏘아붙이기 시작했고. 결국 내 친구들에게 이끌려서 교실 밖으로 나온 뒤에야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선생님이 없어서 다행이었다는 안도감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졸업할 때까지 나기사와 1년이나 더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다. 1학년 끝날 무렵에 우리 과에 편입해서 2학년 첫 전공실기 시간에 음악과 전체와 선생님들을 경악시킨 무시무시한 실력의 소유자 나기사 카오루. 과 애들은 모두 그 애의 친구가 되고 싶어 안달을 냈고, 피아노과 애들은 수행평가 시즌이 되면 자기가 서로 나기사의 반주를 해주겠다고 달려들었다. 모두가 나기사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바이올린도 비싼 것을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외모도 출중하고 성격도 사근사근한 터라, 한때 첼로과의 이카리 신지도 그에게 넘어갈 뻔했다. 그런데 나는 실력과 외모와 성격을 겸비한 그 애가 이유 없이 싫었다. 너무나도 싫었다. 그냥 나기사 카오루라는 사람 자체가 싫었다. 우리 과 애들이 나기사와 내가 잘 어울린다며 엮으려고 할 때는 정말 울고 싶었다. 나기사는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고 왜 우리가 엮여야 하니, 라고 이유를 물었을 뿐이었다. 체면치레 같아서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가끔씩 그 애가 시야에 들어오면 속이 저릿했다.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나고 우리는 축제 때 할 곡의 파트별 악보를 받고 개인 연습실로 들어가서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하기 전에 바이올린을 조율하려고 튜너를 꺼내고 활로 줄을 그어보았다. 반음 정도가 안 맞아서 음을 맞추려고 줄을 돌렸는데,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줄감개도 잘 안 돌아가는 걸 억지로 세게 돌렸더니 줄이 끊어져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는 여분 줄도 없었다.
“오늘은 왜 되는 게 없니! 우타노, 혹시 줄 남는 거 있어?”
“죄송해요, 언니. 저 어제 줄을 싹 교체해서 주말에 사러가려고 했거든요.”
같은 연습실을 쓰는 동생 우타노에게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연습실 문에 달린 창문으로 나기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서 아주 뻔뻔하게 그 애한테 매달렸다.
“나기사, 너 혹시……. 줄 남는 거 있으면 빌려줄 수 있니?”
그러나 나기사는 아까 있었던 일에 별다른 상처를 받지 않았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특유의 옅은 미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에게 대답했다.
“응. 잠깐만 내 연습실로 와 봐.”
순간 나는 저 나기사가 원만한 학교생활을 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일부러 여기에서는 보살처럼 행동하는 것이고, 속은 그 반대라 연습실에서 나랑 한판 싸우려는 건 아닌 가? 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나기사는 평화롭게 나를 자신의 연습실로 데리고 가서 내 바이올린에서 끊어진 줄을 풀어냈다. 그리고 여분의 줄을 꺼내나 싶더니 제 바이올린에 있던 줄을 풀어서 내 바이올린에 감아주었다.
“어제 막 교체했고 한 번도 연주한 적이 없으니까 거의 새 줄이야. 미안해, 이왕이면 막 뜯은 걸로 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아침에 네가 나한테 한 말 말인데…….”
나기사가 잠시 뜸을 들이자, 나는 그 애가 내 언어폭력에 복수할 셈인가 싶어 그 애를 자못 경계했다. 그러나 나기사는 정말로 불상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바이올린 시작했을 때부터 주변에서 들어온 말이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난네가 더 부러운걸. 나는 바이올린에만 재능이 있고 다른 과목은 영 아니라서 내신이 밑바닥인데, 너는 다른 것도 골고루 잘하잖아.”
“…….”
“이번에도 내가 콘서트마스터가 되니까 너한테 미안해지더라. 그래서 말인데, 이미 악기 포지션은 정해졌으니 바꿀 수는 없지만 중간에 나오는 솔로 파트는 네가 하게 해주고 싶어. 괜찮니?”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나기사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 아이는 대체 왜 나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이 아이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어떠한 악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기사와 만난 이후로 줄곧 그를 혐오해온 내가 부끄러웠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솔로 파트라. 노력해볼게. 나기사 네가 준 기회니까. 아침에는 정말 미안했어. 난 너무 내 생각만 하면서 사는 것 같아. 그리고 고마워. 내가 너를 이렇게 싫어하는데도 친절하게 대해 줘서. 저기, 불편하지 않다면 혹시 카오루라고 불러도 돼? 너랑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
카오루는 가만히 눈을 감고 내 말을 듣고 있다가 눈을 뜨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카오루라……. 여기서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좋아. 아직 늦지는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우린 친구야. 그럼 소류, 나도 널 아스카라고 불러도 괜찮겠니?”
신지가 아닌 다른 남학생에게 이름으로 불렸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 얼마든지.”
류정
경찰 au @Dear_Ryuj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 01
뒷목을 잡힌 채로 짓눌려진 기분은 가히 좋지 않았다. 그가 무어라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말없이 뒷 통수에 시선만 내리 꽂힌다.
“어떻게 할거야?”
아야나미 레이가 물었다. 그녀의 질문과 함께 안전고리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뒷골이 서늘하게 울린다. 그는 대답대신 내 뒷머리 채를 잡아 당겨 저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한 그가 마주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 해.”
“뭘.”
“경찰이 아니라고.”
아까 정통으로 맞아 찢겨진 입술로 힘겹게 웃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경찰이야.”
“죽여 버리자.”
“그만.”
그는 언제나 고고했다. 처참하게 배신당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를 내려 보는 시선은 그 어느때 보다 차갑고, 떨렸다. 그는 구둣발로 내 얼굴을 한 번 더 차곤 다른 이들을 시켜 의자에 앉게 했다. 손을 뒤로 가게 하여 수갑을 채웠다. 그리곤 안대를 씌웠다.
“이제 죽일 마음이 들어?”
“아니.”
그의 목소리가 어디에서 울리는지 모르겠다.
“하루 새끼 밥 먹을 때 빼고는 안대 풀어주지 말고 물은 정해진 시간에만 줄 것. 수갑은 한손은 꼭 묶어두고. 은근 독해서 혀 깨물지도 모르니까 개구볼이라도 물려놓던가.”
“잠깐.”
“사랑에 미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어.”
그의 손이 닿았는지 볼이 차갑기만 하다. 한동안 어루만지던 그는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뒀다.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소리가 유독 크게만 들린다.
“네가 뭐던 상관 없어.”
“아스오.”
“나는 너를 보내주지도, 죽이지도 않아.”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 떨림 하나 없었지만 왠지, 이상하게도 그가 울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울고 있다 해도 이제는 눈물을 닦아줄 수도, 나를 바라보게 할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나는 거짓으로 그에게 다가갔으니까.
굳은살이 박인 기억을 더듬으며 - 02
정말로 그는 나를 가뒀다. 여기가 어딘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식사 횟수를 체크하여 날짜를 가늠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의 초침이 망가진 듯 더 이상 시간 감각은 사라졌다.
보고를 하지 않았으니 본부에서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을거다. 하지만 나를 위해 인력을 배치할지는 미지수였다. 쓰다 버리는 장기 말과 다름없다. 그 동안 큰 수확도 없었으니 오히려 내가 배신했다 생각할지 모르겠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그였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안대 좀 풀어줘.”
시간 감각이 사라지니 두 번째로 사라진 것은 방향감각이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만 어디에서 울리는지 알아챌 수 없었다. 나는 어디에 있을지 모를 그에게 최대한 불쌍해 보이려 최대한 노력하며 애원조로 읖조렸지만 그는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담요를 어깨에 덮어주었다.
“안대 좀.......”
“나중에. 내가 내키면.”
처음에 잠입수사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하달되었을 때 절망만이 가득했다. 대부분 신분이 발각되어 시체로 발견 되거나, 실종. 둘 중 하나였다. 내 끝은 어찌될까? 이리 될 줄 알았을까?
“처음 너에 대한 파일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알아?”
“모르겠어.”
그에 대한 파일을 봤을 때 느낀 것은 괴로움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뻗어 봤다. 예상대로 그는 내 앞에 있었다.
“아픈 사람이구나.”
대답이 없어서 나는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생각했지. 그 속을 파고들면 나한테 마음을 다 주고 안심하겠구나.”
그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한 없이 고고했지만 본능적으로 그에게 묻어나오는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그 점을 이용했다. 감정을 파고들었다. 감정을 잡고 뒤흔드니 오히려 숨 막히는 것은 나였다.
이 남자를 속여야한다면 나 자신도 진심이 되어야했다. 그래서 나는 본부에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했다. 중요한 요점들만 피해서 보고를 했고, 그들은 실망했다.
“그리고 네 사랑이 나를 묶어버렸어.”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천천히 내 안대를 벗겼다. 붉은 머리칼이 보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보였다.
“잔인하고.”
안대를 끌어 내린 손이 천천히 턱 선을 따라 내려와 목가에서 멈추었다. 그는 내목을 잡았지만 힘을 주지 못했다.
“아름다워서.”
“사랑해.”
그의 말을 자른 내 고백에 그는 웃지 않았다. 나는 대신 그의 입술에 내 것을 맞추었다. 숨을 불어넣듯. 사랑을 불어넣듯. 건조한 내 입맞춤에 호응하듯 그는 내 뒷덜미를 잡아 당겨 혀를 우겨넣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깨에 둘러져있던 담요는 바닥에 떨어지고 우리는 뒤엉켰다.
Crank Up - 03
“수고하셨습니다.”
조명이 꺼지고 다들 환하게 웃으며 드라마의 끝을 알렸다. 종편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된 드라마는 호응이 좋았다. 소년이었을적 찍은 에반게리온을 시점으로 대 스타가 된 카오루의 티비 시리즈의 복귀이기도 했고, 신인인 아스오와의 케미 덕분에 초반부터 기대를 모았기 때문.
“내 얼굴을 밟아서 기분이 어때?”
카오루의 물음에 아스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극본 때문이라지만 연기를 하다보면 몰입해서 힘 조절이 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은 화장으로 가렸지만 손자국이 크게 난 터라 매니저에게 혼나기도 했고, 아스오 자신도 꽤 미안했던터라 수 십 번을 고개 숙여 사죄했다. 하지만 카오루는 아스오를 난처하게 하고 싶은지 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던졌다.
“연기였다니까요.”
“우리 술이나 마실래?”
“네?”
카오루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다음 작품 너랑 찍고 싶은데.”
아스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풍성한 은발이 찰랑였다. 다가온 그에게서는 좋은 향이 났다.
“너 키스 못하더라.”
“네?”
“그래서 가르켜 주고 싶어서.”
속삭이던 그는 감독의 부름에 좀 이따 보자며 자기 차키를 그에게 던졌다. 아스오는 얼떨떨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내가 키스를 뭘 못 하냐고 속으로 열을 냈다.
다음 작품? 다음 작품이 뭐더라 싶어서 곰곰이 생각하던 아스오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리고 그의 뒷통수를 바라봤다.
“다음작품.....배드씬 있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그는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내 놨다.
‘나 술 마심. 그리고 나 찾지마.’
전화가 울릴테니 아예 배터리를 빼버렸다. 감독과 이야기가 끝났는지 카오루가 아스오에게 다가왔다.
“가자.”
크랭크 업이 아닌 새로운 크랭크 인. 아스오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 기회에 열애설이나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롤라
센과 치히로 AU @oh_xoxo_
1. 맙소사,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잘 놀고 돌아온 집에는 목을 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등 뒤로 비치는 스산한 달빛에 오금이 저려왔으나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무섭고 믿기지 않아서.
2. 아스오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스러져간 제 어머니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주겠다며 나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 공항에 가는 길이었다. 미사토씨나 카지씨와 살면 된다고 그렇게나 말했지만 아버지는 전에 없던 상냥함으로 아스오에게 독일로 오기를 종용했다. 마지못해 아스오는 승낙했으나 영 내키지는 않았다.
아니, 그냥 일본 땅에서 떠나기 싫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대로 독일로 간다는 것은 왜인지 모르게 중요한 것을 두고 떠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 아스오는 복잡해지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쳐다보았다. 녹음이 짙었다. 향도 좋았다. 익숙한 향기. 안정감이 있는 향이었다.
"아스오 도련님. 창 밖으로 고개를 내미시면 위험해요."
"……."
어색하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남자를 흘깃 쳐다보고는 이내 창문을 닫고 제 왼편에 가지런히 놓은 편지와 선물 꾸러미들을 쳐다보았다. '잘지내.' 라는 식상한 말부터 '사실은 널 좋아했었어.' 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이 한가득 적힌 편지는 그닥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일본에 미련이 남는 이유는 절대로 저런 것들 때문이 아니야. 아스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아스오는 남모르게 작게 내뱉고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3. 덜컹. 갑작스럽게 선 자동차때문에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일렁였다. 아스오는 앞좌석에 이마를 부딪히고 말았다. 운전대를 잡았던 남자는 우선 아스오의 상태를 확인하고 차를 보러 나갔다.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쓰는 것이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상태로 아스오는 밖으로 나가 뒷편으로 빽빽하게 자리잡은 나무를 보았다. 어느 것 하나시든 것 없이 모든 것이 생생한 모양으로 자라있었다. 눈을 껌뻑, 껌뻑 수차례 반복하며 그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아스오를 남자가 불렀다. 느릿느릿 몸을 돌리자 남자가 뒷편을 가리키며 음식냄새가 나는 것이 마을이 있는 모양이라며 저곳에서 도움을 구해보자고 했다. 솔직히 아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곳에 자리잡은 마을에 카센터 하나 있을까 싶긴 했지만.
하지만 거대하게 자리잡은 붉은 벽돌의 문을 지나자 아스오의 눈 앞에 보인것은 생각했던 시골 촌마을이 아닌 거대한 유흥거리였다. 다만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뿐인.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아스오는 남자에게 돌아가서 다른 마을을 찾자고 했지만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듯 주인 없는 가게에 앉아 언제 해놓았는지도 모를 음식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먹었다. 무슨 짓이냐며 남자를 끌어내려 했지만 소년이 다 큰 남자를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지금 뭐하는 거, 어? 어어? 왜 이래…?"
숨을 몰아쉬며 아스오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저 그냥, 그렇게 빤히.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눈 앞에 검은 형체들이 일렁이다 사지 달린 괴물의 모습으로 변하고 음식을 주워먹던 남자는 살이 퉁퉁 불은 돼지가 되어 접시에 코를 박고 음식을 먹었다. 다리가 오들오들 떨려왔다. 거짓말, 거짓말. 아스오는 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달려나갔다.
한참을 달리다 돌부리에 걸려 크게 넘어진 아스오는 이를 꽉 깨물고 질끈 감은 눈을 떠 앞을 보았다 다시금 놀랐다. 풀 위에 놓여있는 제 손이 아래에 깔린 풀을 그대로 투영해 보이고 있었다. 손을 바르르 떨며 눈 앞으로 갖다대어도 똑같았다. 여전히 손 너머의 것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아스오는 다급하게 일어나 양 손과 다리께를 보고선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몸이 이상해. 이상, 이상하다고!
울음이 나오려던 것을 여태 참았지만,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뚝뚝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결 좋은 금발을 쥐어뜯으며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울지말고 여기를 봐."
"누, 누구야."
"나는 나기사. 여기서 울고 있는 걸 보니 이 곳 사람이 아니구나, 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나기사를 빤히 쳐다보며 눈가를 벅벅 닦던 아스오는 나기사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자 마법처럼 아스오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기사는 아스오가 일어서자 흙이 묻은 바짓단을 손수 털어주며 아스오에게 조곤조곤 질문을 했다.
"어쩌다 여기로 들어온거니? 여긴 신들의 세계야."
"나도 몰라. 독일로 가려던 도중에 차가 망가졌을 뿐인데 갑자기 운전기사는 돼지가 되어버리질 않나 사람이 아닌 것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여긴 대체 뭐냔 말이야!"
"말 했잖아. 신들의 세계라고. 본래 인간은 들어와선 안되는 곳이야."
단호하게 말하는 나기사를 보며 아스오는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보았다. 제 뒷편으로 활짝 핀 꽃들과 같이 붉은 나기사의 눈동자는 화난 듯, 혹은 슬픈 듯 보였다. 여즉 마주잡은 두 손을 꼼지락대며 아스오는 나기사의 시선을 피해 땅바닥에 고정시켰다. 그러자 나기사는 아스오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괜찮아. 일단은 여기에 있으면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자."
함께 찾는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기사는 카지에게 아스오를 맡기고 떠났다.
4. "시키나미 아스오 랑그레이."
"시키나미…라."
나기사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소녀는 허공에 떠 있는 아스오의 이름을 몇 번이고 휘적이다 이내 손길을 멈추고 아스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소류야."
"무슨 소리야?"
"계약서에 사인해. 소류."
"무슨 소리냐고 내 이름은 ㅅ,"
헙. 입이 말을 내뱉지 못하고 급히 닫혔다. 놀란 눈으로 리리스를 쳐다보았지만 리리스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그를 쳐다 볼 뿐이었다. 마음대로 이름을 내뱉을 수 없게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짜증과 묘한 불안감에 그, 소류는 도끼눈을 뜨고 리리스를 노려보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며 돌아갈 방도를 찾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소류는 울며 겨자먹기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이름을 빼앗겼다.
"앞으로 열심히 일해줘. 소류."
리리스는 승리자의 웃음을 지었다.
5. "소류! 테이블 정리 좀 부탁할게."
"네! 갑니다!"
"그거 끝나면 뒷 마당 정리 좀 해줘!"
소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바쁘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뒤로 한 순간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소류는 몰려오는 피로감과 뿌옇게 흐려진 제 목적에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첫날 이후로 그는 볼 수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없어 짜증만이 늘어갔다. 마치 구해줄 것처럼 손을 뻗었으면서 얼굴을 한 번 비추질 않는 그에게 원망이 쌓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테이블을 부술 듯이 벅벅 닦았다. 테이블을 대충 치우고나서 빗자루를 들고 터덜터덜 뒷마당으로 가는 소류의 등은 힘이 없었다.
터덜터덜 걸어 뒷마당에 도착하니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소류는 가만히 쳐다보다 달려갔다. 나기사. 나기사다. 달려가는 아스오를 놀리듯 나기사는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꽃밭으로 들어갔다. 아스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빠르게 그를 따라갔고 달려간 그곳에는 화사하게 핀 꽃들의 사이에 나기사가 있었다.
"나기사 맞지?"
숨을 몰아쉬며 묻는 소류를 나기사는 그저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소류는 밝게 웃으며 나기사의 앞에 서서 여태 어디에 있었냐며 물었지만 나기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소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 감정없는 눈으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소류가 물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표현을 할 줄 몰랐었던 것처럼 그렇게 나기사는 가만히 서있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나기사가 맞는 걸까? 소류는 자신의 눈 앞의 나기사에 대해 몇 번인가 의문을 품기도 했으나 이내 나기사는 나기사일 뿐이라고 답을 내리고 당연하다는 듯 나기사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레 다가온 온기에 나기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붉은 눈이 소류와 그 뒤로 펼쳐진 초록빛을 가득히 담고 있었다.
"나한테 돌아가게 해준다고 말 했잖아."
"……."
"함께 돌아갈 방법을 찾자고 한 거 아니었어?"
"……."
"난 그렇게 들었는데."
"맞아."
바람소리와 함께 나지막히 나기사의 대답이 들렸다.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인 나기사가 귀여워 소류는 씨익 웃으며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라 얘기했다.
하지만 나기사는 소류처럼 다행이라 생각하지 못 했다. 자신은 아마 소류를 돌려보내지 못하리라…. 나기사는 어렴풋이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대로 말하지 못 하는 것에 죄스러워 더욱더 푸욱- 하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는거지?"
"아마도."
"다음에 만날 땐 먼저 인사해줘."
"그렇게 할게."
태양같이 웃는 소류와 멀쩡하게 다시 만나길 바라며 나기사는 첫 만남의 그 순간처럼 사라졌다.
6. "레이를 데려와."
리리스의 말에 나기사는 아무 말 없이 테라스로 나가 뛰어내렸다. 일순 크게 바람이 일고 창 밖엔 하얀 용이 날아가고 있었다.
7. 소류가 일 하는 것도 익숙해져 스스로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휴식시간에 멍하니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흰 용이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다가오는게 아니라 쫓겨서 도망오고 있었다. 소류는 난간에 딱 붙어 용을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여기로 와. 용은 당연하다는 듯 소류의 품에 뛰어들었고 소류는 용과 함께 방 안으로 쓸려 들어왔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용을 쫓아온 웬 소년이 소류와 용을 번갈아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소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소년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두쌍의 푸른 눈이 마주하자 서슬퍼런 기운이 방안에 맴돌았다.
"너 뭐야."
"그러는 너는 누군데 용을 맨 몸으로 받아?"
"딱 봐도 다친게 비실비실해 보이잖아?"
"용이 얼마나 난폭한 줄도 모르는 게… 너 여기 존재가 아니지?"
"……."
소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하며 다쳐있는 용을 바라보았다. 어느새인가 용은 소류가 잘 아는 인물로 변해있었다. 왜 보자마자 알아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용은, 나기사는 하얗기만 했다. 다급하게 소류는 나기사를 안아서 편히 뉘였고 푸른 눈의 소년은 빤히 그것을 쳐다보다 무언가를 알겠다는 눈으로 소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너 그 용이 소중한거지?"
"……어."
"좋아. 그럼 더 이상은 괴롭히지 않을게. 어차피 레이를 리리스에게 데려가지도 못했고…."
"그럼 빨리 가버려."
"대신 그 용의 안에 있는 리리스의 증표를 없애줘."
"뭐? 내가 어떻게, 아니 그 전에 내가 왜?"
"그걸 없애면 나도 좋고 너도 좋으니까."
"대체 그게 뭔데?"
"어디에 있을지는 나도 사실 몰라. 다만, 레이가 그랬어. 증표가 저 녀석의 뱃속에 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저 녀석이 자유롭게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그 말 사실이야?"
"사실이야."
소류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소년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어느 새인가 소류에 대한 경계를 모두 풀고 자연스럽게 소류를 대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너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듯한 태도에 소류는 살짝 빈정 상했다.
소년은 다 망가진 창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고개만 돌려 소류에게 궁금하면 6번째 역으로 와 레이와 자신을 만나라고 하곤 떠났다.
"대체 뭐야…."
소류는 나기사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8. 용의 모습을 한 나기사를 만난 이후로 또 한동안 소류는 나기사를 만날 수 없었다. 여태까지의 만남에서의 태도를 보건대 나기사는 소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만나러 올 텐데 오지 않는다…라. 역시 요전번에 만난 그 소년의 말대로 나기사가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소류는 믿자야 본전이지, 라는 생각으로 늦은 밤에 몰래 빠져나갔다.
카지에게 들러 인사를 하고 샤키엘에게 원래 입었던 옷과 신발을 받아 챙겨입고 덤으로 빨간 사탕까지 받은 소류는 어째서인지 영영 떠나는 느낌이 들어 싱숭생숭해졌다. 아직 떠나는 게 아닌데. 입으론 중얼거렸지만 마음은 들떠 발걸음이 가벼웠다. 카지는 그런 소류를 보며 나기사를 떠올렸고 이내 둘 다 어리구나. 하며 웃을 뿐이었다.
밖을 나가니 사방이 물이었다. 딱 발목까지 차 신발을 신고 걷기엔 무리가 있는 수위였다. 소류는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길을 나섰다.
여섯 번째 역이라….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고 하늘은 높았으며 태양은 눈부시게 빛났다. 콧노래를 부르며 소류는 그렇게 걷고 걸어 첫 번째 역에 도착했다. 뒷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으로 발을 닦고 신발을 꿰어 신었다. 그리고 검은 인영들 틈바구니에서 조용히 앉아 기차가 여섯 번째 역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한참을 기차가 달렸을까, 어느새 여섯 번째 역에 도착한 소류는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있는 소년을 보고 고개를 작게 까딱, 하고 인사했다. 소년도 그에 답하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말했다.
"드디어 왔구나. 레이가 기다려. 어서 가자."
여전히 하늘은 맑았다. 좋은 징조였다.
"레이. 왔어."
"왔어? 아, 네가 소류군이구나."
레이는 어딘가 나기사를 닮은 얼굴로 수줍게 웃으며 소류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와줘서 고마워. 나는 소류군이 우리 말을 믿지 않는 줄로만 알고…."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않았어."
"고마워."
"어. 응. 그보다 나기사에 관한 그거 말이야…."
"아, 리리스의 낙인."
"증표라더니 뜬금없이 무슨 낙인이야?"
"증표라고 하지만 사실은 낙인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아. 그건. 아마 나기사 본인도 모를 거야. 언제 낙인을 삼켰는지조차. 그렇다고 나나 신지, 그러니까 저기 있는 우리 오빠가 직접 그 낙인을 제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나기사가 낙인을 삼키기 전부터 나기사를 알고 있었던 사람. 우리는 아니지만 너는 맞는 것 같아. 아니 확신할 수 있어. 넌 나기사를 아주 예전부터 알았을 거야. 그렇지 않고선 용을 맨 몸으로 받아낼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
"용을 맨 몸으로 끌어안은 게 그리 대수야?"
"용 스스로가 성체가 되기 전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한 대상이 아닌 이상 용에게 맨 몸으로 손을 댈 수 있는 존재는 없어. 그리고 나기사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이미 성체였어. 그러니까 확실해. 너는 나기사를, 우리를 도울 수 있어."
"그래. 그렇다치고. 그래서 방법은?"
"방법은 간단해. 나기사를 만나면 지금부터 만들 팔찌를 건네줘. 네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아서 팔찌에 엮을텐데 이걸 나기사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네가 가지고 있으면 돼."
"간단하네. 그럼 지체할 것 없이 빨리 만들자고."
적극적인 소류를 보며 레이와 신지는 몇 백년, 아니 어쩌면 몇 천년 만에 온 자신들과 나기사의 해방에 환하게 웃음지었다.
9. 밤이 되었을 무렵 소류가 돌아가야 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레이는 다시 한 번 자신이 한 말을 잊지 말라며 당부하곤 실과 소류의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팔찌를 건네 주었다. 소류와 나기사를 위한 것 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소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는 어색하게 팔에 끼웠다. 레이는 그것을 보고 잔잔하게 웃음지으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소류군. 나기사가 찾아온 듯 해."
그 말에 밖을 쳐다보자 정말로 나기사가 용의 모습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류는 문을 벌컥 열고 나가 나기사의 코에 얼굴을 부비며 언제 왔느냐, 기다렸냐, 쫓아온거냐, 라는 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장난을 쳤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와 신지는 살풋 웃으며 늦었으니 어서 가보라고 손짓했다. 소류는 나기사의 뿔을 잡고 올라탔고 둘은 하늘을 날아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소류의 귓전을 때렸으나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되려 상쾌했다. 하늘에도 냄새가 있구나, 하며 소류는 두 눈을 감고 나기사에게 조곤조곤 말을 걸어왔다.
네가 데리러 올 줄은 몰랐어.
애초에 여기에 온다는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안 거야?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우리 커플 팔찌 생겼다.
내가 만든 거니까 꼭 끼고 다녀.
지금 끼워줄까 아예?
지금 끼자.
소류는 손을 뻗어 나기사의 손일 것이라 추정되는 앞발에 끼워줬다. 그리고 그 순간 나기사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역린이 뜯겨 나가더니 비늘까지 찬찬히 전부 벗겨져 익히 알고있는 나기사의 모습이 되었다. 나기사의 붉은 눈은 울망거리며 소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류는 손을 뻗어 나기사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기억났어."
"뭐가?"
"내 이름."
나기사는 자신의 두 손을 쭉 뻗어 소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마주한 두 사람은 갑작스레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여실히 드러냈다.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전혀 두려운 기색없이 행복해했다.
"내 이름은 카오루. 나기사 카오루야."
"나기사 카오루. 카오루."
흐르는 눈물들이 떨어지는 두 사람과는 상반되게 하늘 위로 방울져 올라갔다. 마주댄 두 이마와 마주잡은 두 손이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상기된 두 볼이 여태까지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걱정했는지, 얼마나 아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네 이름은?"
"나는 소류…. 아니, 소류가 아냐 나는……."
"아스오."
"아, 맞아. 아스오. 아스오였구나. 네 이름은 아스오였어. 맞아, 아스오였어."
"맞아 너는 아스오야."
"나는 소류가 아냐, 나는 시키나미 아스오 랑그레이야."
"맞아. 그게 네 이름이야."
카오루는 아스오와 코를 부비곤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스오. 나는 널 항상 지켜보고 있었어."
"나를?"
"네가 길을 잃었을 때, 길을 비춰준 적도 있고 스탠드가 고장났을 때 네 방을 비춰준 적도 있었어."
"그게 다 카오루 너였어?"
"응. 나야."
"그럼 그 날, 어머니가 죽었던 그 날도 너였어?"
"나야, 다 나였어."
전부 카오루였다는 말 한 마디에 여태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실이 되어 아스오를 한없이 기쁘게 했다. 길을 잃고 울던 때에도 시험을 앞두고 스탠드가 망가져 잔뜩 짜증이 나있었을 때에도 그리고 다른 수 없이 많은 때에 늘 카오루는 아스오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스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으면서 잔인했던 그 날. 그 날 카오루가 있었기에 아스오는 여기까지 제 두 발로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카오루가 아스오를 지켜봐주지 않았다면 그 날 아스오는 어머니를 따라 갔을 것이었다. 분명히.
하지만 카오루가, 스산하게 자신을 비추던 그 달에게 시선을 빼앗겨 아무 것도 인지 할 수 없게 되었기에 아스오는 감정에 휘둘려 어머니를 따라 죽는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살린 것은 카오루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스오는 제 감정을 더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아스오는 카오루에게 입맞췄다.
다정하게,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눈이 감기고 어느새인가 눈물도 멈췄을 때, 그들의 발은 당연하다는 듯 물 위에 얹어져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서 한참을 입맞췄다.
10. 이름을 기억해내고 카오루를 자유로이 만들어준 아스오는 리리스에게서 이름을 돌려받아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음에도 카오루의 손을 잡고 한참을 세계의 문 앞에서 망설였다. 정말로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걸까? 라는 물음만이 수없이 뇌리에 머물렀다. 돌아가게 된다면 카오루와 헤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일지 몇 번이고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돌아가고 싶운 마음도 그리 깊지 않으니 카오루와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해 입을 뗐는데.
"돌아가."
카오루는 단호하게 말했다.
"왜?"
파란 눈이 올곧게 카오루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네가 있을만한 곳이 아니야. 여기 있는 동안 느꼈잖아."
"네가 있다면 견딜만 한 것들이야."
"아니야.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되면 더 한 일들이 많을거야. 그러니 돌아갈 수 있을 때 돌아가."
"내가 이대로 돌아가면 너는?"
"……."
"너는 어쩔건데."
"……."
"넌 어떻게 할 거냐고."
"널 만나러 갈게."
"……."
"꼭 만나러 갈게.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돌아가서 기다려줘."
"진짜로?"
"응."
"기다릴게."
"기다려줘."
"계속 기다릴테니까 다치지 말고 조심해서 와."
"빨리 갈게. 안 다치고."
"새끼 손가락 걸어. 약속해."
"약속."
의외로 무덤덤한 얼굴로 아스오는 카오루를 쳐다보았다. 여즉 마주잡은 두 손이 살풋 떨려왔다. 카오루는 이젠 정말 돌아갈 시간이라며 아스오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문의 건너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팔을 뻗을 수 있을만큼 쭈욱 뻗었고 아스오는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한계에 다다라 두 손이 떨어졌을 때 아스오는 이상하리만치 냉정하게 앞만 보고 걸어갔고 카오루의 손만이 아쉬움을 간직해 허공에 그대로 뻗어있었다.
"……만나러 갈게."
아스오가 사라진 언덕을 보며 카오루는 중얼거렸다.
結. 햇빛이 강하게 내리 쬐던 여름이었다. 아스오는 벤치에 앉아 몇 년 전부터 줄곧 차고 있던 팔찌를 보았다. 언제 무슨 이유로 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팔찌였음에도 아스오는 도저히 이것을 뺄 수가 없었다. 그냥 한 없이 그립고 그리운 기분이 들어서. 분명 중요한 것일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속상하기도 했으나 이젠 아무렴 어떠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적당히 산책도 했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하품을 하며 걷다가 그만 사람과 부딛혀 넘어졌고 아스오는 짜증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 넋을 놓았다.
"기다린다더니 정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나보네?"
제 앞에 선 사람은 자신이 한 것과 똑같은 팔찌를 찬 손을 제게 내밀었다.
"…나기사 카오루라고 해. 기다려줘서 고마워."
카오루. 잊었던 그 이름은 카오루였다.
"다시 만났네."
"응."
하늘은 높았고 태양은 눈부시게 빛났다. 그 날처럼.